조선의 제11대왕
중종은 연산군 때의 여러 가지 폐정을 개혁하기 위해 홍문관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문신의 월과, 춘추과시, 사가독서, 전경 등을 엄중히 시행하였다. 문벌세가를 누르고 새로운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1515년 신진 사류인 조광조를 등용해 우익으로 삼고, 그가 주장하는 도학에 근거한 철인군주정치를 표방해 기성 사류인 훈구파를 견제하려 하였다. 유교주의적 도덕규범인 향약을 전국적으로 실시하였다.
현량과를 두어 친히 김식 등 유능한 신진 사류 28명을 뽑아 언론, 문필의 중요직에 등용해, 이른바 이들 사림파를 중심으로 한 지치주의적 이상정치를 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들 신진 사림세력의 과격하고 지나친 개혁정치는 기성 훈구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521년 기묘사화의 여파로 심정·남곤의 당인 송사련의 신사무옥이 일어나 안처겸 등의 사림파가 다시 숙청되었다. 1524년 심정,남곤 등에게 쫓겨났다가 기묘사화 이후 정계에 복귀한 권신 김안로가 파직되었다.
이듬 해 3월에는 윤세창 등의 모역사건이 일어났다. 1527년 김안로의 아들 희가 심정, 유자광을 제거하려고 일으킨 동궁의 작서의 변이 일어나 경빈박씨와 복성군이 쫓겨나 원사하였다. 이렇게 훈구파 상호간의 정권쟁탈전이 극심하게 벌어져 정국은 더욱 혼란해졌다.
1531년 그 동안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김안로가 다시 집권하자 정계는 더욱 혼란에 빠졌다. 이에 대립해 중종의 외척인 윤원로 형제가 등장해 정계는 훈신과 척신 사이의 대립으로 발전해 김안로가 추방되었다. 이러한 척신의 대두는 마침내 1545년 을사사화의 전주를 이루기도 하였다.
경국대전, 대전속록 등을 간행하였다
일본의 아시카가 막부의 간청으로 1512년 임신약조를 체결하였다. 종래 쓰시마에서 파견하던 세견선과 조선정부에서 하사하던 세사미두를 반감하였다. 또한 항거왜의 삼포 거주를 엄금하고 제포 하나만을 개항하는 등 왜인의 내왕을 엄격하게 제한하였다.
엄격한 규제정책에도 불구하고 국내 정국의 혼란이 계속됨으로써 왜변이 자주 일어났다. 1522년 5월 추자도 왜변과 동래염장의 왜변, 1525년 9월 전라도 왜변이 대표적이다. 중종 말년인 1544년 4월에는 왜선 20여 척이 경상도 사량진에 침입해 인마를 약탈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임신약조를 파기하고 왜인의 내왕을 금지하였다.
오랜 재위 기간 동안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많은 편찬사업도 진행되었다. 1516년에는 주자도감을 설치해 많은 구리활자를 주조해 인쇄술 발달에 기여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당시 사회에 긴요하게 요청되던 각종 서책이 편찬, 간행되었다.
경국대전, 대전속록 등을 간행하였다. 1540년에는 역대의 실록을 등사해 사고에 배치하였다. 또한 1542년 근정청을 설치해 대전속록 이후 새로 반포된 법령을 모아 이듬 해 7월 대전후속록 을 완성 반포해 법률제도의 확립을 꾀하였다.
1534년 2월 명나라에 기술자를 파견해 이두석, 정청 의 조작법과 훈금술을 배워 오게 하였다. 1536년에는 창덕궁 안에 보루각을 설치해 누각에 관한 일을 보게 하였다. 또한 1538년에는 천문, 지리, 명과학에 관한 새로운 서적을 명나라에서 구입해 연구개발에 힘쓰게 하였다. 1544년 11월 14일 세자인 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15일 창경궁의 환경전에서 재위 39년 만에 승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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