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 성장과정이 작품에 미친 영향
정확한 출생연도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1506년 전후로 추정된다. 그는 개성에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서녀였다. 아버지는 황씨 성을 가진 양반으로 일설에는 진사였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기생 또는 천민 출신으로 누구인지 분명치는 않으나 아마도 진현금 이라고 불리던 시각 장애인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일설에는 시각장애인인 평민의 딸로 태어났다는 전설도 있다. 그녀가 살던 장단군 입우물 고개에는 1945년 광복 당시까지도 약수가 나왔다고 한다.
조선의 신분제인 종모법에 따라, 황진이는 아버지가 양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천출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학문과 예술그녀는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지만 양반집 딸 못지않게 학문을 익히고 예의범절을 배운 것으로 봐서는 물질적으로 큰 어려움이 없었던 것 같다. 여덟 살 때부터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열 살 때 벌써 웬만한 한문 고전을 읽어내고 한시를 지을 정도로 재능을 보였으며, 서화에도 능하고 가야금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그녀가 기생이 된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시각장애인이던 어머니가 기녀 출신이었다는 설과 짝사랑하던 남성의 존재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설, 서녀 출신임을 비관하여 스스로 기녀가 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 그녀를 짝사랑하던 한 남성이 혼자 연모하다 어머니 진현금을 찾아가 청혼을 하였으나 어머니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남성은 상사병에 걸려 죽게 되었다. 뒤에 이 사실을 접하고 기생이 되었다 한다.
황진이 시의 가치와 교훈
황진이 작품에서는 높은 감수성에서 우러나온 탁월한 언술적 기법 및 수사적 기교가 두드러져 시조문학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작가의 외면적 고찰보다 작품의 내적 연구에 치중하는 이유는 황진이 시조가 비록 6수에 불과하지만, 48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고시조나 현대의 어느 시조작품보다 그 표현기교나 수사가 빼어날 뿐 아니라, 그 문학적 가치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다.
황진이의 작품은 시조 6수와 한시 8수가 전한다. 시조 작품 중, 동짓달 기나긴 밤을,어져 내일이여, 청산리 벽계수야, 내 언제 무신하여, 산은 옛 산이로되 등이다. 황진이의 시조 작품은 주로 연회나 풍류의 장소에서 지어졌다. 그리고 기생의 작품이라는 사회적 금기의식 때문에 후세에 많이 전해지지 못하고 인멸된 것이 많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그의 시조 작품이 비록 6수에 불과하지만, 상상을 뛰어넘는 탁월한 감각적 표현과 세련된 언어구사, 재치 넘치는 수사기교는 후세 작가들에게 작시법의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황진이 시에 나타난 사회 문화적 환경
황진이의 추정 생존 연대는 중종 7년 1512년-명종11년 1555년 이다. 조선사회는 양반중심의 사회였다. 학문과 사상의 배경으로는 인간의 심성에 대한 탐구를 심화시킨 성리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맹인인 어머니 진현금의 딸로 송도에서 태어났다. 어릴적 부터교방과 같은 기생의 교육기관인 여악에 맡겨졌다. 그곳에서 황진이는 시서와 가락을 배우면서 어린 시절을 지냈다. 빼어난 용모와 자태 그리고 총명함과 예술적 재능은 동료들로 부터 부러움을 샀다.
훗날 성장해 빼어난 용모와 재능으로 명기 명월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고 그 성품이 활달하고 강직하여 많은 남성들의 애를 태웠다. 황진이는 문인, 유학자들과 교유하며 탁월한 시적재능과 용모로 그들을 매혹시켰다. 황진이는 당대의 일류 명사들과 정을 나누고 벽계수와 깊은 애정을 나누며 난숙한 시작을 통하여 독특한 애정관을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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