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 성장과정이 작품에 미친 영향
어려서 할아버지에게 한학을 공부하였고, 영천 소재의 옛 백학서원인 백학학교와 보문의숙·교남학교를 다니고 1926년 북경 조선군관학교, 1930년 북경대학 사회학과에 적을 둔 적이 있다 하나, 그 연도나 사실 여부가 확인된 것이 아니다. 경력은 항일운동가로서의 활약이 두드러지는데, 1925년에 형 원기, 아우 원유와 함께 대구에서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1927년에는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이밖에도 1929년 광주학생운동, 1930년 대구 격문사건 등에 연루되어 모두 17차에 걸쳐서 옥고를 치렀다. 중국을 자주 내왕하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3년 가을 잠시 서울에 왔을 때 일본 관헌에게 붙잡혀, 북경으로 송치되어 1944년 1월 북경 감옥에서 작고하였다.
이육사 시의 가치와 교훈
이육사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단어들과 표현들은 겉으로 나타나는 의미보다 더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광야를 보더라도 이육사의 시에 담겨 있는 독립에 대한 저항의식을 느낄 수 있다. 시의 배경이 되는 광야 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공간이며 어떠한 움직임조차 찾아볼 수 없는 공간입니다.
2연에 와서 광야라는 공간은 그 의미는 더욱 확실해지는데요. 광야란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공간으로 누군가의 노력에 의해 역사의 변화가 시작된다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육사 시인은 가난한 상황 속에서 미래의 희망을 담은 노래의 씨를 뿌리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는 언젠가는 매화향기 가득한 봄이 올 것이고 이를 위해 준비를 해야 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처럼 그의 시에는 조국 독립에 대한 희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여러 독립운동을 통해 그의 믿음을 현실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육사 시인은 감옥에 갇혔지만 시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감옥 에서도 시를 열심히 쓰던 이육사 시인에게 일본군은 무섭게 고문을 하였고 결국 감옥 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염원하는 시로써 일제에 저항한 독립운동가 이육사 시인이다.
이육사 시에 나타난 사회 문화적 환경
1930년대 이후부터는 일제의 민족 말살 통치가 실시됩니다. 무단통치, 문화통치의 시기에서 이제 민족 존재의 자체를 부정하는 통치가 시작되었다. 일본에선 경제공황의 타개책으로 일본과 한국을 하나로 묶는 정책을 시도하였다. 이 정책 때문에 우리나라의 쌀과 쇠로 만든 모든 것, 가져갈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수탈해갑니다.
굶주림과 허기로 죽어간 사람들도 많았다. 수탈은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것도 수탈해갔다. 국어와 국사 교육의 금지, 황국 신민의 서사 암송, 창씨개명, 신사 참배 등등 민족정신을 없애려는 정책을 폈다. 1940년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고 우리나라의 젊은 여성들은 정신대로 그리고 청년들은 일본의 학도병으로 끌려갔다.
정신대로 고통당한 할머니들은 지금까지도 사과를 요구 하고 있다.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일제 말기는 어둡고 암울한 시기였다. 이육사의 광야는 이런 일제시대의 어두운 현실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반드시 해방이 된다는 의지도 불태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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