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 성장과정이 작품에 미친 영향
9세 때인 1910년 옥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12세 때인 1913년 동갑인 송재숙과 결혼했다. 17세 때인 1918년 서울로 올라와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휘문고보에 재학하면서 박팔양 등과 동인지을 발간하였으며, 1919년 3ㆍ1운동 당시에는 교내 시위를 주동하다가 무기정학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1919년에 창간된 월간종합지서광에 3인 이라는 소설을 발표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이화여자대학교의 교수가 되어 한국어와 라틴어를 강의하였고, 경향신문의 편집주간으로 활동했다. 1946년 2월에 사회주의 계열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조선문학가동맹의 아동분과 위원장으로 추대되었고, 그해에 시집 지용시선을 발간했다.
1947년에는 서울대학교에서 시경을 강의하기도 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이화여대 교수를 사임하고, 지금의 서울 은평구 녹번동에 초당을 짓고 은거하며 문학독본을 출간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에는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되었다. 이후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었다가 사망하였다.
정지용시의 가치와 교훈
정지용은 1930년대에 우리 시단에서 눈부신 활약을 했다가 49세가 되던 해, 6.25 동란이 일어나서 북으로 끌려가 평양감옥에 이광수, 계순 등 납북문인들과 함께 수감되어 있다가 얼마 후 비행기 폭격으로 폭사당해 비극적인 일생을 마친 우리의 천재시인이다.
만일 지용이 식민지 시대의 시인이 아니었고, 또 외세에 의한 이데올로기 전쟁의 희생물이 되지 않았더라면, 그가 지금쯤 우리들에게 얼마나 더 훌륭한 많은 시를 남길 수 있었을 것인가는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러한 예측과 가정은 그가 우리들에게 남긴 두 권의시집백록담에서와 정지용 시집이 우리 현대시사에 한 장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으로 충분히 증명이 되고 있다.
그의 시가 이렇게 훌륭했기 때문에 유종호는 정지용을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라고 했고, 오탁번은 그가이땅의 현대시를 자주했던 미당, 청마, 두진, 목월, 지훈 등의 정신적 배후에서 항상 대부노릇을 했다고 말했다. 어찌 그것뿐이랴. 그의 시적 영향은 김춘수, 박재삼, 황동규, 오세영, 박제천, 조정권 등과 같은 우리시대의 시인들 사이에서 아직까지 숨쉬고 있다.
정지용 시에 나타난 사회 문화적 환경
1920년대 시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은 3·1 운동이었다. 당시 20세 안팎의 젊은 시인들은 대부분 동경 유학생 중심의 2·8독립 선언이나 3·1 운동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였다. 3·1 운동이 실패한 뒤 이들은 현실의 벽 앞에서 강한 무력감과 절망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은 불가피하게 이들을 부정적인 현실 인식과 퇴폐적인 삶으로 이끌어 갔다. 따라서 이들은 국권 상실과 3·1 운동의 실패로 인한 좌절감을 문화적인 측면에서 보상받으려고 했고, 이러한 경향은 이른바 문화 정치로 인해 언론 출판의 자유가 부분적으로나마 허용됨으로써 현실성을 얻게 된다.
해방 직후 정지용은 카톨릭 재단의 신문사인 경향신문의 주간이 되어 날카로운 사회비판을 쏟아놓는다. 불과 1년간이었지만 시에서는 표현하지 못한 현실인식과 민족의식을 드러내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정지용은 해방이 됐건만 사람들의 굶주리고, 나라의 운명은 갈피를 잡지 못하던 당시의 현실을 과감히 비판했다.
그러나 정지용의 직설적인 논지는 수많은 적을 만든다. 이후 투서와 모함이 이어져 경향신문사를 사임한 정지용은 녹번리에 은둔한다. 그러나 세상은 사라진 그를 두고 좌익이라는 꼬리표를 다는 것은 물론, 월북하였다는 허위기사를 대대적으로 보도한다. 이러한 그의 방황과 6.25 전쟁 중의 행방불명은 그를 월북작가로 분류하게 만드는 빌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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