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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입시(인문계열 자료실)

김수영 작가와 작품세계

by kjk쌤 2025.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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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성장과정이 작품에 미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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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관철동에서 아버지 태욱과 어머니 안형순 사이의 8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효제보통학교 6학년 때 뇌막염을 앓아 학교를 그만둔 뒤, 1936년 선린상고에 들어가 1941년 졸업했다.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상대전문부에 입학, 미즈시나에게 연극을 배웠다. 1943년 겨울 징집을 피해 귀국하여, 1944년 가족과 함께 만주 지린 성으로 이주했다. 해방 후 돌아와 연희전문학교 영문과 4학년에 편입했으나 곧 그만두었다.

6·25전쟁 당시 미처 피난하지 못해 인민군에 징집되었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었다. 8군 통역, 모교인 선린상고 영어교사와 평화신문사 문화부 차장 등을 맡으며 여러 직장을 돌아다녔다. 1956년부터는 집에서 닭을 기르며 시창작과 번역에만 전념했다. 그의 나이 47세 때인 1968615, 집 앞 거리에서 버스에 치여 그 다음날 숨졌다.

김수영 문학관
김수영 문학관

김수영 시의 가치와 교훈

김수영의 시는 보다 나은 세계를 향한 꿈과 열정, 순수의 훼손에서 오는 비애와 시니시즘, 그러면서도 다시 한 번 일어서보겠다는 오기 등으로 어우러져 있다. 시적 상상력은 지금, 여기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1970년대 정치, 사회문제에 대한 깊은 관심을 시적 상상력으로 바꾸어놓으려던 시인들은 그에게서 비판의지, 독설과 자조의 수법, 세상을 뒤틀어보기, 언어희롱 등의 태도와 방법을 배웠다. 그의 시는 말하자면 몰이해적인 명상 또는 근본지의 산물이라기보다, 끊임없이 삶에 부대끼면서 욕설을 내뱉거나 비명을 지르는 것에 가깝다.

김수영은 자유의 시인이다. 그는 돌에서 피를 뽑아 낼 정도의 치열한 자유의지로 우리 근대사의 뼈아픈 역사와 삶의 생채기를 온몸으로 껴안은 시인이다. 따라서 자유란 테마는 그의 시세계 전체를 관통하며 끈질긴 탐구의 대상을 이룬다. 이런 자유의 정신으로 벼려진 칼빛 언어에는 시적 진정성을 구현하기 위한 김수영의 혹독한 자기 수련이 아로새겨져 있다. 결코 현실의 장벽에 굴복하지 않는 도저한 자유의지는 물 위를 날아가는 돌팔매질로 그려지곤 한다.

김수영 시에 나타난 사회 문화적 환경

1960426일 이른 아침에 쓴 이 시는 419의 순수 절정의 순간을 직접 호흡하고 있다는 미덕을 안고 있다. 이날 나온 이승만 대통령의 사의 표명은 2백명 가까운 젊은 목숨을 바쳐가면서 학생과 시민들이 갈구하던 바의 최대치는 아니더라도 그 최소치에는 가까웠던 것이다.

1960315일의 제5대 정부통령선거는 국부 이승만의 본질과 한계를 노골적으로 드러낼 기회와도 같았다. 노욕과 망상으로 똘똘 뭉친 우남이 입 안의 혀 같은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키고자 저지른 미증유의 선 거부정은 당장 그날로부터 민중의 거센 저항에 부닥친다. 마산에서 터져나온 항의시위는 8명의 사망자와 72명의 부상자를 냈지만, 그보다는 그날 실종된 한사람이 결과적으로 더 큰 파장을 몰고 오게 된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411일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 나침반은 이미 하와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김수영은 1945년 묘정의 노래, 공자의 생활난 등을 발표하며 시단에 등장했다. 1968년에 성, 풀 등의 작품을 유언처럼 남기고는 돌연한 교통사고로 죽음에 이른 그는 생전에 시인으로서뿐 아니라 평론가와 번역가로서도 왕성한 활동을 했다.

그의 시와 산문의 배경이 되고 있는 강렬한 현실 감각과 사회의식 에서 비롯하는 것인데 좀더 깊이 들어가 보면 시와 관련한 그의 사유 구조 자체에서 비롯하는 것이기도 하다.

김수영은 시와 사회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개진할 때 언제나 일단의 대립항들을 설정해 놓고 그것들이 맺는 부단한 긴장관계를 강조한다. 사상과 형태, 침묵과 요설, 언어의 서술과 언어의 작용, 기술가적 발언과 지사적 발언, 검증과 생성, 시를 쓰는 것과 시를 논하는 것, 예술성과 현실성, 내용과 형식 등이 그가 설정한 주요 대립항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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