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본관은 평강. 본명은 형석이며, 호는 거평이다. 활동 과정에서 형세, 군선 및 군선, 형석 등의 이름을 사용하였다. 평안남도 영원 출신으로, 병묵의 외아들이다. 고향에서 의명소학교 를 졸업하였다. 1910년 서울의 오성학교 에 입학했으나 학교가 폐쇄되자, 21살 때 군사학을 배우기 위해 조선보병대 에 입대하여 4년간 복무하였다.
활동
스스로 군사기술을 전수 하면서 내일을 기대하였다 고 하였듯이, 4년이라는 청년기의 짧지 않은 조선보병대 복무 사실은 채원개의 독립운동 역정이 군사활동 부문 쪽으로 두드러지게 되는 발단이 되었던 것으로 파악해 볼 수 있다.
조선보병대는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될 때, 근위보병대와 근위기병대가 남겨졌는데, 1913년 이중 근위기병대는 해산되고, 보병대는 조선보병대로 축소 개편되어, 1920년대 말에 직면한 경제공황 상황을 배경으로 해산되었다. 참고로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투탄 의거의 장진홍 의사와, 1921년 거물 부일배 민원식 처단 의거의 양근환 의사 등이 조선보병대 출신이다.
1919년 3・1운동 때 귀향하여, 3월 28일 예준기・홍태번・이운서 등 고향 친구들과 동서면 주민들이 참여한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체포되었다가 탈옥한 다음, 장진・강계 등지에 잠시 피신한 다음, 8월 16일 북평면장김 모의 안내로 북하동 에서 국경선을 넘어 안동현의 남평여관에 투숙하였다가, 이륭양행 선편으로 상해에서 귀국 중이던 김진성이라는 인물을 만나, 상해와 만주지역의 독립운동 정황을 청취하고, 북만주행을 결심했다.
그가 1923년 무렵 서간도 지역 독립운동단체가 통합하여 결성한 통의부 대표로 선출되어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한 사실, 임정으로부터 참의부 군무부장에 임명된 사실, 임정으로부터 황포군관학교 교관으로 파견된 사실 등은 그가 1920년대 초중반 서간도 독립군 진영과 임정 지도부로부터 군사방면의 능력을 평가받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조선보병대 교육 및 재만 독립군단체인 대한독립단 활동 등에서 축적된 군사 방면의 능력과 경험이 높이 평가받았고, 임정을 중심으로 하는 독립운동 진영의 범주 안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는 결과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가 이승만 대통령 탄핵재판소 심판위원으로 활동한 사실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수립 초기 임정 운영에 있어서 평안도 출신 인물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실과 결부시켜 생각해 보면, 평안남도 출신이라는 지연 또한 이러한 유추를 뒷받침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그는 광복군에 참여하여 고급참모 직을 수행하였는데, 고급참모 직은 중국측 군정기관과의 공조협의 업무를 주로 담당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1927년 황포군관학교 교관 부임 이래 십여년 간 쌓은 중국군 복무 경험과 인적 기반은 중국 측의 지원과 협조가 절대적으로 요구되었고, 중국 측의 지휘와 간섭에도 적절히 대처하며 임정의 국군으로서 독자성을 견지하고자 했던 광복군의 운영과 활동에 기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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