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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입시(세계사.한국사 자료실)

유학생 운동을 주도한 이옥

by kjk쌤 2024.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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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은 1895611일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나 안동의 보문의숙과 서울의 휘문의숙에서 공부한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안동사립보통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191931운동 이후 경북 안동 지역의 유력가, 재산가, 학교, 종교 등을 조사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고하는 조사원으로 활동했다.

1920년경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과에서 유학하며 학우회의 서무부장, 총무 등 주요 간부로 활동하였다.

19239월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학살이 자행되자 유학생들의 피해 상황을 조사하고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서울에서 꾸려진 임시재경일본유학생회 및 동경지방이재조선인구제회 상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4년 학우회 조직이 종래의 평의원제에서 대표위원제로 바뀌었을 때 위원으로서 동경 지역 독립운동을 주도하여 요시찰 인물 을호로 항상 감시와 경계의 대상이었다. 일본 경찰이 동경 지역 한국인 청년 학생 운동의 주요 인물 7명 중 1명으로 이옥을 꼽을 정도였다.

19242, 동아일보에 이광수가 쓴 사설 민족적 경륜이 연재되자 학우회를 비롯한 일본의 7개 유학생, 청년, 노동단체는 이 사설의 내용이 민중을 기만하는 타협적, 굴종적 타협운동을 종용한다고 비판하는 성토문을 공동으로 작성, 발표했다.

31일에는 학우회, 여자학흥회, 조선노동동맹회 등 동경의 한국인 학생, 청년, 노동단체가 연합으로 개최한 31운동 기념 강연회에서 불온한 언동을 한다고 검거되었다.

5월 재일한국인 노동운동 단체인 동경조선노동동맹회의 간부로도 활동했던 이옥은 같은 해 4월 서울에서 개최된 조선청년총동맹 창립대회에 학우회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 해에 졸업한 이옥은 조선으로 돌아가 11월 시대일보 이사가 되었다가 이듬해 4월 퇴직하였다. 19272월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창립대회 때 간사로 선임되어 동맹휴학의 원인 조사 및 대책 강구를 위한 조사위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신간회 경성지회 정기대회 대표회원 및 간사로 선임되기도 했다. 같은 해 6월에는 사회사정조사연구회를 창립했고 이듬해 1928년 신간회 정치문화부 총무간사로서 활발히 활동했다.

자료: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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