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2월 29일 충청도 문의현 이도면에서 부친 오우석, 과 모친 남양 홍씨홍계익의 딸 사이의 2남 3녀 중 막내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조부는 부호군을 지낸 오형학 이다.
그녀가 어느 곳에 태어났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으나, 청주 인근의 현도면 등지에서 보성 오씨 집성촌이 많은데다가 증조부 오종대와 부친 오우석, 큰오빠 오해성의 묘소가 현도면 죽전리에 있고, 조부 오형학의 묘소가 현도면 시목리, 작은오빠 오해명의 묘소가 현도면 죽암리 등지에 있으므로 현도면에 친정이 있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1926년 3월 딸을 데리고 상하이로 망명한 뒤 남편을 모시는 동시에 독립운동가들의 수발을 드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 사위 박영준은 장모를 독립운동가 치고 오건해 여사의 음식을 먹어 보지 못한 사람은 독립운동가가 아니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음식 솜씨가 좋은 오건해 여사는 독립운동가의 뒷바라지에 평생을 보낸 분 으로 회고했다.
1937년경에는 병약해진 이동녕의 병환 치료에 정성을 다했고, 만주에 가족을 두고 홀로 충칭으로 와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박찬익의 뒷바라지에도 힘썼다. 박찬익은 1940년 화평로 청사에서 화재가 나 머리를 다쳤고, 연화지 숙소가 일제 공군의 폭격으로 무너져 어깨를 부상당하기도 했다. 이때 오건해의 정성스런 간호로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1938년 5월 6일, 지청전, 유동열, 현익철, 김구 등이 창사 남목청에서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의 통합을 논의했다. 이때 갑자기 조선혁명당 간부 이윺ㄴ한이 회의장에 뛰어 들어 권총을 난사하였다. 이로 인해 현익철은 현장에서 즉사했고, 김구, 유동열은 중상을 입었으며, 지청천은 경상을 입었다.
중상을 입은 김구는 즉시 상아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김구의 상태를 진찰한 중국 의사는 소생할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응급처치도 하지 않은 채 문간방에 방치해 두었다. 하지만 김구는 기적적으로 소생했고, 응급 치료를 받은 뒤 퇴원했다. 오건해는 김구가 퇴원 후 요양할 때 식사 등의 봉양을 맡았다. 김구는 충칭시기 홀로 시내에 머물며 임시정부를 이끌었는데, 이때에도 거의 모든 숙식을 오건해가 맡아 보살폈다고 한다.
1940년 6월 17일, 충칭에서 한국혁명여성동맹이 창립되었다. 오건해는 여기에 참여했다. 그리고 1942년부터 한국독립당원으로 참가하여 활동했다. 1943년 3월에는 한국독립당 중앙조직부의 조직을 정리할 당시 제2구 당원이 되어 1945년 해방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활동하였다. 광복 후 귀국하여 서울에 정착했고, 1963년 12월 25일에 서울에서에서 사망했다.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 오건해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4년 6월 30일에 그녀의 유해를 국립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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