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1872년 6월 13일, 충청북도 옥천군 문정리에서 부친 김명성과 모친 연일 정씨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범재, 이명으로 김복이 있다
조부에게 한학을 배웠으며 스승의 권유로 상경하였다. 1902년 내부주사를 시작으로 1905년 숭릉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임하였다.
활동
1901년에 시무학교의 후신인 중교의숙의 교원으로 활동하였고, 1905년 8월경 옥천에 세워진 진명학교에 보조금을 지원하였다. 이후에도 옥천에 창명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 계몽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1906년에 창립된 대한자강회 회원이 되어 국권 회복 운동에 동참하였다.
광무황제가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당한 1907년 7월경 황제의 측근들과의 교류를 통해 국외에 맡겨둔 왕실 경비를 가지고 중국에서 한인 군관을 양성하라는 밀명을 받았다. 광무황제의 밀명을 수행하기 위해 인천에서 배를 타고 중국 망명을 시도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으며 약 100일 정도 감금되었다 풀려났다.
1908년 초경 광저우로 이동해 중국 혁명운동의 중심기관인 동맹회 남방지부 중심의 반청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10년과 1911년에 일어난 광저우 무창봉기에 참여하였다. 1912년 8월 혁명 성공 후 혁명정부인 광동군정부가 수립되자 공로를 인정받아 광동도독부 휘하 군사 치안 기구인 광동총수정처 참의에 임명되었다.
이어 1913년 초 도독부 하에 설치된 최고 군사 기구인 광동호군사서의 고문원 등 중요 직책에 임명되었다. 1913년 이후 제2혁명인 토원운동이 시작되자 홍콩으로 거처를 옮겼다.
하지만, 여전히 우쓰노미야와 연락을 유지하였고, 두 차례에 걸쳐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그의 편지는 모두 두 통이며, 편지 내용은 면담 때 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의 독립은 시기상조이며, 자치권을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요인에 대해 회유 공작을 벌이고 있는 상황 등도 보고하였다. 그러면서 만저우은행을 설립해 배외한인 에 대한 근본적인 감화를 해야 한다며 은행 설립 자금을 요청하였다.
결국 요청한 실업은행 설립 자금은 제공받지 못하였으며, 1920년 2월 이후에는 그마저도 완전히 연락이 끊겼다. 이러한 이유를 들어 우쓰노미야와의 면담 과정이나 편지에서 그가 주장한 언사들은 자금 지원을 받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라는 의견도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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