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728x90
반응형

교육, 입시(인문계열 자료실)53

조만식 독립운동가 생애와 활동 생애1883년 2월 1일 평남 평양부 진향리에서 창녕 조씨 조경학과 경주 김씨 김경건 사이의 1남 2녀 중 독자로 태어났다. 호는 고당, 어릴 때 별명은 조장손이며, 조선의 간디라 불리기도 한다.1888~1896년 평양 관후리의 서당에서 평생의 동지인 김동원・한정교 등과 함께 장정봉에게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1895년 두 살 연상의 박씨와 결혼하였다. 1897년부터 평양 종로에서 백목전을 운영하였으며, 이후 한정교와 지물상을 동업하면서 재산을 축적하였다.1902년 부인 박씨와 사별하고 전주 이씨 이의식과 재혼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대동강 중류의 베기섬 벽도지리로 이주하였다. 이 무렵 한정교의 권유로 평양 장대현교회에 출석하면서 기독교에 입교하였다.활동1905년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였으.. 2024. 11. 24.
조경환 독립운동 활동 활동1907년 7월 고종의 강제 퇴위와 더불어 정미7조약의 체결로 인해 한국인의 반일 감정은 더욱 고조되었다. 더욱이 8월 1일에 단행된 군대해산을 거부한 시위대와 진위대가 전국 각지의 의진에 합류하거나 독자적으로 의병을 일으켜 일제의 군경과 전면전을 벌였다. 그리하여 전국의 산과 들은 의병의 깃발과 함성으로 메아리쳤다. 박은식의 이러한 주장은 일제 당국의 통계를 통하여 입증된 바 있다. 일제 자료에 따르면, 1908년 전라도의 의병들은 일본 군경과 교전 횟수와 교전 의병수에서 전국 대비 25%와 24.7%를, 1909년에는 47.2%와 60%를 차지하였다.그만큼 조경환 의병장의 빛나는 항일투쟁의 반증이라 판단된다. 따라서 이 글은 조경환 의병장의 항일투쟁을 복원하는 방향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하고자 한다.. 2024. 11. 24.
일제강점기 유학생과 학우회 일제강점기 한국인에게는 고등교육의 기회를 주지 않는 일제의 교육정책으로 인해 대학 등 고등교육을 받고자 하는 한인 학생들은 유학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중국, 미국 등 외국으로의 유학이 쉽지 않았던 당시 실제로 유학이 가능했던 곳은 거의 일본으로 한정되었다.한국인 학생의 일본 유학은 1881년 신사유람단 파견으로 시작되었다. 유학생들은 일본에서 학업을 연마하는 한편 단체를 만들어 친목을 도모하면서 계몽활동을 펼쳤다. 최초의 유학생 단체는 1895년에 설립된 대조선인일본유학생친목회였다. 이후 제국청년회, 태극학회, 대한유학생회, 대한학회 등을 거쳐 1909년 첫 통합단체인 대한흥학회가 탄생하여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1912년 10월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는 7개의 출신지방별 유학생 친목회의 연합체로 설립되었.. 2024. 11. 23.
한국의 인구 정책 1940~1950년대 인구 증가 정책일제 해방 당시 한국의 인구는 약 2500만 명으로 고출산, 고사망을 보였고 일제의 식민 정책 탓에 외국으로 유출된 인구가 많았다. 1950년대에는 전후 복구의 필요성과 베이비붐이 겹치면서 다산을 장려하는 분위기였다. 이 때, ‘가족계획사업’은 정부의 국가 차원이 아닌 개인 연구소나 해외 선교사를 통해 이루어졌고, 국가적으로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제3공화국’ ‘경제개발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면서부터이다.1960~1980년대 인구 억제 정책1960년대, 정부는 베이비붐 세대가 1980년 전후부터 가임 여성 인구로 진입하게 되므로 이들의 출산율을 낮추기 않으면 인구 증가를 멈추지 못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또한 여전히 남아 있는 남아선호사상이 출산율을 낮추는데 어려.. 2024. 11. 23.
반두복 독립운동가 생애와 활동 생애1914년 울산 일산진에서 태어나 1927년 보성학교에 입학했다. 절친인 천경록과 1926년 동면 에서 만들어진 적호소년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문맹 퇴치와 민중의식 고양이 목적이었지만 항일정신이 강한 소년단체였다.활동 박두복은 보성 졸업 후 항일운동의 길을 걸었다. 1930년대 초반부터 경남적색교원노조로 활동하면서 여러 번 구속과 출옥을 반복했다. 적색교원노조는 일제강점기 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학생들과 노동계에 침투해 일제의 조선 식민지 정책을 비판하고 항일정신을 고취시켰다. 박두복은 1933년 비밀결사 교원노동조합을 결성한 후 체포되어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중생활을 했다. 이후 그는 부산에서 한국인들을 못살게 구는 일본 헌병을 살해한 후 만주로 도망갔으나 검거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2024. 11. 23.
이효정 독립운동가 생애와 활동 생애1913년 7월 28일 경상북도 봉화에서 출생하였다. 1세에 부친의 별세로 서울에서 잠시 있다가 만주 봉천으로 망명하였다. 3년 뒤 귀국하여 서울에서 할아버지의 교육을 받았다. 독립운동가 집안의 딸로 민족의식이 높았고, 자부심도 강하였다. 동덕여고보를 나와 교원, 간호부 생활도 잠깐 하였지만 공장에 취업, 노동운동을 하였다. 박두복과 결혼하여 울산에서 생활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남편이 월북하고는 좌익으로 몰려 오랫동안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2010년 8월 14일 사망하였다. 활동동덕여고보에 입학한 후 한글학자 이윤재의 민족주의에 공감하였으며, 5촌 아저씨 이병기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에 입문하였다. 3학년 때 이평산의 경성RS협의회의 독서회에 가입, 활동하였다. 박진홍, 이순금 등과 백지.. 2024. 11. 22.
유도발 독립운동가 생애와 활동 생애유도발과 유신영은 부자관계로 풍산을 본관으로 하는 서애 유성룡의 10세, 11세 후손이다. 유성룡은 퇴계 이황의 문하로 영남학맥을 이었다. 임종할 때 자손들에게 “힘써 마땅히 삼갈지어다. 충효 외에는 다른 것이 없다”라고 하면서 ‘충’과 ‘효’를 가문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제시하였다.이로써 유성룡 이후 풍산 유씨 가문은 충효를 가업으로 삼았다. 유성룡의 장손 유원지는 후손들에게 우리 집안은 다른 것이 없고 오직 충효청백만 있을 뿐이다 라고 하여 할아버지 유성룡의 유지를 전했다. 유도발 집안은 유성룡의 아들 유단 이후 자손이 없어 줄곧 양자로 이어졌다. 유단은 형제 유진의 둘째 아들 유백지를 양자로 삼았고, 그 후 유후승, 유성흠, 유익, 유필조, 유진휘 등 선대가 양자로 대를 이었다. 그만큼 그는 집.. 2024. 11. 21.
역사왜곡과 우리의 대응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이 유명한 명언을 말한 사람은 누구인가?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모른다 고 답할 것 같다. 혹은 단재 신채호 선생 내지는 윈스턴 처칠 을 떠올린 사람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모두 사실무근 하다. 많은 사람들이 단재 신채호 선생이 조선 상고사 에서 역사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한 말이라고 알고있거나 윈스턴 처칠이 한 말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조선상고사 어느 부분에도 이 문장이 나와있지 않았고 윈스턴 처칠이 이 말을 했다는 증거 또한 찾아볼 수 없다. 우리가 수 없이 듣고 가슴에 새겼던, 역사의 중요성을 무엇보다 강렬하게 외치던 명언의 출처조차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런데 그런 우리가 어떻게 역사를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진실이라 배우고 오랫동안 그렇.. 2024. 11. 21.
안공근 독립운동가 생애와 활동 생애1909년 평남 진남포보통학교 부훈도로 재직하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가 일어난 직후 사직하였다. 1919년 상해의 임시정부에 가담하여 이듬해 1월 모스크바밀파외교원에 선정되었다. 그 해 10월에는 임시파로외교위원에 선임, 러시아를 상대로 외교활동을 벌였다. 1921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정원의 황해도의원으로 선임되었다.활동한편, 1920년 12월에는 상해대한인거류 민단의사회 의원으로 선임되고, 1926년 2월에는 여운형의 후임으로 상해한인교민단장에 임명되어 상해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결속을 위해 노력하였다.1926년 5월에는 조상섭· 최창식· 이유필· 오영선 등과를 조직, 한국 민족의 해방을 촉성하기 위하여 철저한 독립운동자의 조직적 대단결을 달성하려 한다. 는 선언을 발표하고, 그 회장이 되어 활동하였.. 2024. 11. 21.
독도 사랑 캠페인(동아리 활동) 독도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목적독도는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섬으로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1∼96번지에 위치해 있는 우리의 영토이다. 역사적, 지리적으로 대한민국의 영토인 독도를 왜, 우리 영토라고 말해야 하는가? 왜,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서 주장하고, 해외 광고매체를 통해 광고까지 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에 대하여 고민을 했다. 일본은 시마네현 조례로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하여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여기에 대한 우리의 대응 방식으로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주장만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방법은 결국 독도를 분쟁지역화 해서 어려움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대한민국 동해바다 독도는 우리 주민이 어엿하게 살고 있고, 대한민국이 관할하고 있으며, 독도경비대가 수호하고 있다.그래서 독도의 .. 2024. 11. 21.
728x90
반응형